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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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의약품 또는 의료기기의 안전성은 어떻게 평가될까? 왜 유전자변형식품은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되어 유통되고 있을까? 각종 의약품, 의료기기, 식품, 화장품 등의 안전기준은 어떻게 정해질까? 이렇게 위험의 평가와 기준설립과 같은 규제를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규제에 관련된 지식들을 생산하는 과학활동을 규제과학이라고 부른다.

정책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규제과학

전통적으로 규제를 담당하는 정책의 영역과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의 영역은 완전히 분리된 다른 영역처럼 생각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아래 그림과 같이 어떠한 독성물질을 규제하려는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정책적 요구가 제기될 경우 정책과 독립된 영역에 있는 과학 공동체가 그와 관련된 과학적 사실과 정보들을 제공해주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2                                                                 전통적인 과학-정책 관계 모형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 한미 수입쇠고기 위생조건 개정 2차 협상 타결 이후에 벌어진 논쟁이다. 타결안 반대세력은 새로 들어선 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학적 결론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제기하였고, 정부 측은 자신들은 단지 국제수역사무국(OIE, Office international des épizooties)의 국제과학표준을 준수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 논쟁은 2008년 6월의 추가 협상을 통해 정부가 한발 물러선 이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가라앉기는 했으나, 우리 사회에 과학-정책의 관계에 대해 깊이 숙고할 여지를 남겼다.

전통적인 과학-정책 관계 모델 속에서, 논쟁의 참여 당사자들은 과학과 정치를 분리한 채 상대방을 비과학적인 사람들로 정의하고 자신들만 건전한 과학에 기초한 것으로 비난하는 상황으로 빠지기 쉬운데, 이는 실지 양 측 모두 ‘과학적 증거’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든다(네이버캐스트 [과학논쟁] 참고). 이같은 전통적인 정책-과학 관계 모형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넘어 규제와 유관한 과학적 작업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그것의 특성이 어떠한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모형이 바로 규제과학 모형이다.

3                                                                 과학-정책의 관계에 대한 규제과학 관점의 모형

규제과학은 정책과 과학 양자에 맞닿아 있는 독특한 종류의 과학이다. 이 모델 하에서는 규제와 관련한 과학지식을 요청하는 정부 입안자와 과학자가 서로 독립된 정책과 과학이란 영역에 있는게 아니라, 규제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규제과학이라는 혼종적인(hybrid) 영역에 존재한다. 이 규제과학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물은 정부, 기업, 대중을 포함한 여러 이해당사자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과학적 사실 논쟁이 자주 벌어지며, 그러므로 사실 입증 과정과 절차가 일반적인 과학자 공동체 내의 논쟁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같은 규제과학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과학과 이 규제과학의 차이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학술과학과 규제과학

학술과학의 특성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인 학술과학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확대를 목적으로 하고, 전문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학술적으로 중요한 연구를 생산하는 일이 주된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학술적 과학 연구는 주로 대학 실험실에서 이뤄지며, 연구를 통해 연구자는 자신의 학술적 전문성을 인정 받을 뿐만 아니라, 교수 등과 같은 직위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개인이 재단의 지원사업 예산을 받아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연구 결과를 일정 기간 내에 도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술적인 연구 주제에 대해 특정 기간이 주어지고 그 내에 연구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상황은 거의 없다. 학술과학에서 연구자들이 수행한 연구는 저널 투고 등을 통해 동료 과학자들의 동료 평가(peer review)를 거쳐 연구의 객관성과 과학적 가치를 인정 받는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동료 과학자들은 연구 결과를 조작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논문 연구자가 현재 과학 공동체가 동의하고 있는 연구 방법론을 적절히 사용하여 연구결과를 도출했는지를 검토한다.

규제과학의 특성

규제과학은 학술과학과 전혀 다른 연구 목적, 연구 평가 절차, 그리고 연구 결과를 갖는다. 규제과학의 연구 목적은 규제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생산하거나 정책 결정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규제를 위한 과학 연구는 대학보다는 주로 정부나 기업 산하의 연구소에서 이뤄지고, 이같은 규제과학 연구가 이뤄지는 까닭은 정책 입안자나 기업 등이 규제와 관련된 법률적 요건을 충족시키는데 있다. 기업들이 자신들이 개발한 화학물질 함유 제품들에 대해 독성 검사를 받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규제과학 연구는 보통 규제 법안 입안 시기 전까지 수행해야 하는 등 연구 시간의 제약이 주어진다. 이에 더해 규제과학 연구자들이 수행한 연구는, 종종 규제와 관련된 학술저널에 실리기도 하지만, 보통 정부 보고서의 형태로 출판되며, 이렇게 출판된 보고서는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이뤄지기 보다는 규제 관청의 감사나 현장 방문, 사법적 검토, 입법기관의 감독과 같은 정책 보고서 검토의 형태를 띈다. 학술과학에서 연구의 신뢰성은 동료집단에 의해 과학 공동체에 의해 승인된 연구 방법론을 적절히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지만, 규제 과학 연구 결과가 믿을만하냐는 판단은 입법부, 법원, 여론과 같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구가 위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규제관청의 가이드라인 및 프로토콜을 적절히 준수했는지, 그리고 법적으로 증거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검토들을 통해 이뤄진다.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이 보여주었듯이 어떠한 과학 연구활동도 해당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맥락과 분리할 수 없지만, 규제과학 연구는 법원에 의한 연구의 감독, 의회에 의한 예산 책정, 연구 고위직이 정부에 의해 임명된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학술과학에 비해 보다 명시적으로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규제과학은 다른 종류의 과학

비록 학술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규제과학은 과학적 기준과 규범을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해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은 규제과학은 정치적 요소가 가미된 비과학이 아니라 학술과학과는 다른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종류의 과학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규제과학을 정치에 오염된 비과학이라고 비난하는 대신, 우리 시대의 산물인 이 독특한 종류의 과학의 특성을 살펴보는 일이다.

코펜하겐 비즈니스 스쿨에서 연구 학장을 맡고있는 과학기술학자 앨런 어윈(Alan Irwin)과 동료들은 자사노프의 연구를 바탕으로 규제과학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명료하게 정의했다. 규제과학은 학계뿐만 아니라 산업계와 정부 산하에 위치한 과학활동으로, 다양한 분과적 배경과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들의 협동을 통해 이뤄지며 다양한 수준의 과학적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포함한다. 이 규제과학의 과학활동은 테크니컬한 것뿐만 아니라 정책적인 것과도 연결되며, 이 과학활동과 관련된 규제와 관련해 규제 완화나 강화를 위한 로비와 논쟁들이 벌어지는 점을 고려해보면, 규제과학의 연구활동은 과학적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목적 하에서 이뤄진다.

규제는 국가별로 스타일이 있다

다양한 수준의 과학적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을 포함하고, 정책적인 일과 연루되며, 규제과학의 관심이 과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동일한 대상을 규제하려는 목표를 지닌 과학이라 하더라도 각 사회와 국가들마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심에 따라 규제 여부나 규제 방식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사노프를 비롯한 많은 과학기술학자들은 국가별 비교를 통해 각 국가마다 얼마나 다른 ‘규제문화’를 지니고 있는지를 탐구했다.

자사노프에 따르면, 어떤 국가든 각기 다른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경험을 통해 발전시킨 독특한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각기 어떠한 형태의 주장이 믿을만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어떻게 명시되고 방어되며 재현되어야 하는지가 달라지는데, 자사노프는 이를 시민 인식론(civic epistemology)이라고 부른다. 시민 인식론은 한 사회 내 행위자들이 집합적 선택을 만들기 위한 기반으로 이용하는 지식을 배열하고 시험하는 제도화된 실행들의 집합이다. 사람들은 이것에 따라 어떤 과학적 주장이 타당한지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GM 식품의 안정성은 90년대부터 현재까지도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의 대상이었다. <출처: (cc) Daniel Goehring>

생명공학의 결과물에 대한 규제에 있어 미국과 영국, 독일이 각기 어떠한 시민 인식론에 근거하여 차이를 보였는지 살펴 보자. 예를 들어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전자변형식품(genetically modified food: GM식품)의 안전성 논란은 미국과 유럽 각국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의 대상이었다. 1990년 국제식품생명공학위원회(IFBC)는 GM식품의 안전성 평가를 위한 실질적 동등성(substantial equivalent) 개념을 제안하였고, 이 개념은 이후 1993년 OECD에서 GM 식품 안전성 평가의 원리로 확립되었다. ‘실질적 동등성’이란 도입되는 유전자의 특성이 잘 알려져 있어, 원래의 식품과 실질적으로 동등한 정도로 무해하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 확신이 있는 경우에 그 GM 식품의 안전성은 원래의 식품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실질적 동등성 개념에 기초한 계량적 분석을 통해 GM식품의 안전성 논란이 가라앉았다. 이와 달리 영국과 독일에서는 이후로도 안전성이 충분히 확립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논란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시민 인식론에서는 형식적이고 숫자로 표시된 객관성이 중시되었음에 비해, 영국과 독일에서는 사회 내 여러 행위자들 간의 협상을 통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도출하는 협상된 객관성이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상이한 위험 검증 절차가 요구되었는데, 일례로 영국에서는 해당 문제에 대한 경험을 가진 현장 전문가들 사이의 협의를 거쳐 도출된 것이 객관적 지식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위험 평가 외에도 전문 자문가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져야 했다.

GM식품 분쟁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이 서로 다른 규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잘 드러났다.

시카고대 교수인 법학자 선스타인(Cass Sunstein)은 유럽과 미국 사이의 GM식품 분쟁을 분석하며 과학적 불확실성이 있을 경우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기초해 GM식품의 안전성에 대해 문제삼은 유럽의 정책 입장을 정치적이고 비과학적인 태도라고 주장했다. 규제과학의 렌즈는 이러한 과학 대 비과학, 혹은 과학 대 정치의 구도를 넘어서, 국가 간 제품 안전성을 둘러싼 분쟁을 국가 별로 서로 다른 규제문화와 시민인식론 사이의 충돌로 읽고 새로운 지평들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 하대청, 「사전주의의 원칙은 비과학적인가?: 위험 분석과의 논쟁을 통해 본 사전주의 원칙의 ‘합리성’」, 『과학기술학연구』10 (2010), 143-174쪽.
  • 한국식품정보원, “유전자재조합 농작물의 안전성평가의 기본이 되는 ‘실질적 동등성’이란” (http://foodi.iin.co.kr/ 2012.12.21 접속)
  • Alan Irwin, Henry Rothstein, Steven Yearley and Elaine McCarthy, “Regulatory ScienceTowards a Sociological Framework“, Futures 29 (1997), pp.17-31.
  • Sheila S. Jasanoff, “Contested Boundaries in PolicyRelevant Science“, Social Studies of Science 17 (1987), pp.195-230.
  • Sheila Jasanoff, The Fifth Branch: Science Advisers as Policymaker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 Sheila Jasanoff, “Procedual Choices in Regulatory Science“, Technology in society 17 (1995), pp. 279-293.
  • Sheila Jasanoff, Designs on Nature: Science and Democracy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 Simon Shackley and Brian Wynne, “Global Climate Change: The Mutual Construction of an Emergent SciencePolicy domain“, Science and Public Policy 22 (1995), pp. 218-230.

 

출처: 네이버캐스트 규제과학 (글현재환 | 과학기술학 연구원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과학기술학(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tudies, STS) 박사 과정. 현재 서울대학교 홍성욱 교수와 함께 하는 STS Collective(STS.Collective@gmail.com)에 참여하고 있다. 2013.01.07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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